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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17. <부정공>이기헌공휘창석묘갈명(二既軒公諱昌錫墓碣銘)
1. 문헌 목록 〉20. 20世 〉19. <부정공>명곡공휘창기묘갈명(明谷公諱昌驥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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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부정공>학생공휘창원묘갈명(學生公諱昌源墓碣銘)
學生公諱昌源墓碣銘 公諱昌源字乃進玉川人世居谷城始徙南原素有潜德窃惟我六代祖考四昆季孝友文行當時目以爲有相好梅窓遺風其長房卽公所自出爲吾家小宗後承之親愛逈別故先君子初年隨寓並閈服公最深未嘗不亟稱之於家少輩顧不肖曷敢一日忘諸今東夏以隨銘屬余曰曾大父畢生隱約知德者希與其得於素昩或爽其實母寧從相熟者謀焉以無負府君尙褧之心謹按其狀狀乃其孫履齋處士永學戒誣先之信筆未卒業而爲之復曰昔望溪方氏最謹嚴於文平生爲文非目所覩不經以記載嗚呼早喪怙恃辛勤樹立公其韓昌黎也陳公之奇淸苦妻以女公其鮑宣也大者如此而其餘群行又皆竊聽於家庭間其所耳稔不翅目之覩如則雖以望溪之謹嚴當汲汲記載之不暇安事乎辭謝爲哉公雅性忠厚敦朴者委禽于陳館因家焉南之帶洞是己勵志治生始得小康弱齡風樹追遠致誠慨志不充學購好書先於買良田愛文士加於待衆賓置塾敎子推及族戚村秀之貧不能學者特念婦翁後事慰撫備至周甲之歲分予田地自弟與妹至子女莫不均一儉於自奉而饑歲濟活甚多噫此皆出於眞淳惻恒以求吾心之所安己矣視世之作一事行一惠沾沾自好務欲沽名干譽者其賢不肖果何如也公生 正宗辛丑卒 憲宗乙酉享年六十九墓在谷城牛谷面外彌勒洞卯原盖改遷而從先兆也吾趙氏自麗迄我代有名德詳屢世狀碣曰諱瓛宗國斗采寔公曾祖祖禰也咸安趙氏道貫外大父也配貫驪陽考始瓚敬承夫子助成家業生卒爲己酉乙未墓別葬男長馨九以文藝著次定九次經九民九女適朔寧崔廷孝豊川盧光杓長水黃正祿內外孫曾男女凡二十六人而永學有儒門淵源東夏亦思張家學抑公貯書遺後之報其在斯歟此固可銘銘曰木之初生牛羊踐兮及見干雲孰不驚兮培根食實此理晣兮莫曰辛苦善必報兮繄公茂德宜受祜兮勸成好施疇如公兮仁人之後胡不昌兮爲告無窮銘此詩兮 族弟 寅錫 撰 학생공휘창원묘갈명(學生公諱昌源墓碣銘) 공의 휘는 창원(昌源)이요 자는 내진(乃進)이며 옥천인 인데 대대로 곡성에 살다가 남원으로 이사하고 본래 숨은 덕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니 우리 六대조고 四형제의 효우문행(考友文行)을 당시에 이르되 상호매창(相好梅窓)의 유풍(遺風)이 있었다고 하였고 그장방(長房)이 곧 공의 소자출(所自出)이요 우립 차 종손이 되므로 후손의 친애가 자별하여 선군자(先君子)가 초년에 따라 우거하여 담을 나란히 하고 가장 깊이 공에게 감복하여 일찍 가소배(家少輩)에게 극히 칭도하였으니 돌아 보건데 불초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잊으리요, 이제 동하(東夏)가 갈명을 내게 부탁하며, 가로되 증대부가 평생에 신계(信契)를 숨겨 덕을 아는 자가 드무니 그 본래 범연한 사람에게 얻어 혹 사실을 어기는 것보다 도리어 서로 친숙한 사람과 상의하여 써 부군의 겸손한 마음을 저버림이 없게 하리라 하였다. 삼가 그 장문을 살피니 장(狀)은 그 손자 이재 처사 영학(履齋處士永學)의 선조 속임을 경계한 신필(信筆)인데 일을 마치지 아니하고 옛적 망계 방씨(望溪方氏)가 가장 문자에 근엄하여 평생에 글을 쓰는데 눈으로 보지 않는것은 가볍게 쓰지 아니하였다고 되풀이 하였다. 아! 슬프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렵사리 수립 하였으니, 공이 그 한창려(韓退之)와 같고 진공(陳公)이 청고(淸苦)한 것을 기특히 여겨 딸을 보내 사위로 삼았으니 공은 그 포선(鲍宣)이와 같도다. 큰 것이 이와같고 그 외에 뭇 행실은 꼭 다 내가 가정에서 들어 귀에 익은 바요, 눈으로 본 것 뿐이 아니로다. 나 같으면 비록 망계(望溪)의 근엄으로써도 마땅이 기재를 여가없이 쉬지않고 노력할 것이니 어찌 사절하겠는가? 공의 맑은 설정이 충후돈박(忠厚敦朴)하여 진관(陳館)에 취한 뒤로부터 인하여 주거하였으니 남원대동(南原帶洞)이었다. 뜻을 가다듬어 생업을 다스리니 비로소 조금 편안함을 얻었고, 어릴때 가신 부모를 따르지 못하고 멀리 추모하고 정성을 다 하다가 학문을 배우지 못함을 마음으로 개탄하여 좋은 책 구입을 좋은 전답 사기보다 먼저하고, 글 잘하는 전비를 사랑하기를 여러 손님 대접하는 것보다 더하여 서당을 만들어 자제를 가르치며, 족척촌수(族戚村秀)가 가난하여 능히 배우지 못한 자에게 추급(推及)하였다. 특별히 처가의 후사를 생각하여 위로하고 어루만지기를 지극하게 하고 환갑 해에 전토를 나누어 주어, 아우 여동생으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균일치 아니함이 없었고, 자봉(自奉)을 검약하여 흉년에 구제를 많이 하였다. 아! 이러한 것은 진실한 측은지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내 마음이 편안할 바를 구할 따름이었다.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조그마한 은혜를 베풀고 경박하게 스스로 기뻐하여 이름을 구하고 명예를 탐하고저 힘쓴 자와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공은 정종(正宗) 신축(一七八一)년에 출생하여 헌종(憲宗) 기유(一八四九)년에 향년 六十九세로 별세하여 묘소가 곡성 우곡면 외미륵동 묘원(谷城牛谷面外彌勒洞卯原)에 있으니 대개 다시 옮겨 선영을 따른 것이다. 우리 조씨(趙氏)는 려조에서부터 아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계승한 명덕(名德)이 여러 대에 걸친 장갈(狀碣)에 상세히 보인다. 휘 헌(瓛) 종국(宗國) 두채(斗采)는 공의 증조(曾祖) 조(祖) 니(禰)요 함안 조씨(咸安趙氏) 도관(道貫)이 외대부(外大父)였으며 배는 여양 진씨(驪陽陳氏) 시찬의 녀(始瓚之女)로 부자(夫子)를 공경하여 받들고, 가업을 도아 이루었다. 생졸은 기유(己酉) 을미(乙未)요 묘소는 따로 모시었다. 장남 형구(馨九)는 문예로써 이름이 높았고 차는 정구(定九)·승구(承九)·경구(經九)·민구(民九)요 녀는 삭녕(朔寧) 최정효(崔廷孝), 풍천(豊川) 노 광표(盧光杓) 장수(長水) 황 정록(黃正祿)에게 출가하였으며 내외 소증이 무릇 二十六인 이었다. 영학(永學)이 유문연원(儒門淵源)을 보유하였고, 동하(東夏) 또 가풍(家風)을 대개(大開)할 학문을 생각 하였으니 이 또한 공이 책을 사서 뒤에 끼친 보답이 이에 있도다. 이것이 진실로 가히 새겨둘만한 것이로다. 새겨 가로되 나무가 싹이 돋으니 소와 염소가 밟다가 뻗어 구름을 범한 것을 보면 누가 놀래지 아니하리요. (木之初生牛羊踐兮及見干雲孰不驚兮) 뿌리를 북돋아 열매를 먹으니 이 이치가 밝도다(培根食實此理晣兮) 신고 한다 이르지 마라 착한 것은 반드시 보시하는 도다(莫曰辛苦善必報兮) 거룩하다 공의 성덕이여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도다(繄公茂德宜受祜兮) 부지런히 일워시여를 좋아하니, 뉘가 공과 같으리요(勸成好施疇如公兮) 어진 사람의 뒤가 창성 아니하리(仁人之後胡不昌兮) 고할 것이 무궁하나 이 시만 새기노라(爲告無窮銘此詩兮) 족제(族弟) 인석(寅錫)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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